입문기라...
카라가 데뷔할 무렵 저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여서 하루종일 예능만 찾아보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하는 일 마다 진전이 안되고 망하기 일쑤에다 출판사에서는 글 내놓으라는 독촉 전화에..빚쟁이 전화에..일이 안되니 부모님 얼굴 보기도 힘들었구요. 그러다보니 굳이 예능이 아니라도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는 것이라면, 가볍고 밝은 것이라면 뭐라도 좋았습니다. 아니면 그냥 죽어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냥 방에 쳐박혀서 매일 밤 본방으로 예능을 보고, 낮에는 일본 예능, 미국 시트콤, 코믹한 드라마나 영화...뭐 가리지 않고 다운 받아서 봤습니다. 그때는 토렌트가 아니라 웹하드를 이용했었는데, 매일 자는 시간 말고는 영상을 다운 받아 보다보니 돈도 꽤 많이 들었었죠. 뭐 어쨌든 그러다보니 연예 기사도 자주 보고, 지금은 아니지만 공중파 음악 방송도 꾸준히 보고 있는 상황이었죠. 다만 케이블은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데뷔는 원걸이 빨랐습니다만, 저는 카라를 먼저 알았습니다. 데뷔 전 홍보 방송으로 케이블을 선택하고 거기에 집중했던 원걸과는 달리 카라는 신문 기사로 홍보를 시작했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에게는 카라 소식이 먼저 들렸던 겁니다. 제 2의 핑클이 준비 중이라는 소식 말이죠. S.E.S 팬클럽이면서도 핑클을 더 좋아했던 저는 기대가 됐습니다. 핑클은 재밌었거든요. 그렇게 카라를 기다리던 참에 원걸이 공중파 데뷔를 했습니다. 참..별로 였어요. 늙어 보이고 못생겨 보이고 재미도 없어 보였습니다. 15살 짜리 어린 애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방송에 나와서 그런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것 자체도 마음에 안 드는데, 프로듀서가 박진영이라는 것도 짜증나는 일이었어요. 넌 대체 저렇게 어린 애들을 데려다가 뭘 하려는 거냐?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한테 불공정한 계약해서 이런 식으로 돈을 버는 거냐? 뭐 대체로 그런 생각들을 했었죠. 당시에는 원걸 멤버들에게서 재능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그들이 그냥 헛바람든 로보트로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얼마뒤 데뷔한 카라도 마찬가지였어요. 원걸처럼 대놓고 어린 여학생을 노린 컨셉이라는 느낌은 없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늙은 아저씨가 질러대는 보컬과 귀여운 애 하나 내세워서 핑클의 열화버젼을 내놓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원걸보다 더 했습니다. 질러대는 보컬은 짜증났고, 얼굴 마담 같은 애는 열의도 없어 보였습니다. 전혀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애도 있었구요. 성희, 승연, 규리였습니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건 니콜 하나였는데, 남자 중학생같은 어린애 얼굴에서 순수함과 고집, 열정이 얼핏 보였습니다. 라는 건 좀 과장이고, 어린애가 외국에서 여기까지 와서 저런 걸 하고 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정이 갔습니다. 얼굴도 불쌍해 보이... 암튼 그때는 원걸, 카라 통틀어서 니콜 하나 외우고 넘어갔죠.
그런데 이때쯤부터 슬슬 공중파 프로그램은 두 세번씩 봐버린 상태라 새로운 것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케이블에 조금씩 손을 대기 시작했죠. MTV원더걸스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보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이게 대체 뭐하는 프로그램인가 싶고, 애들도 정이 하나도 안가고. 방송 자체에 대한 믿음도 안 가고. 그걸 꾸역꾸역 보는 동안 소녀시대 데뷔전 홍보 방송인 소녀 학교에 가다가 방영을 시작했습니다. 이건 본방으로 보기 시작했어요. MTV원더걸스 보다 더 심하더군요. 인위적인 설정도 너무 심하고, 데뷔도 안 한 애들이 능구렁이 같이 방송에 익숙해 보이는 게 짜증날 정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이해가 안 가는 데, 그때는 아이돌 자체가 싫었으니까요. 그건 그렇고...카라 방송은 볼 수가 없었어요. 이쪽은 정이 안가기는 마찬가지인데다 너무 오그라들어서... 원걸 방송은 '세상에 이런 일이', 소시 방송은 '스타킹', 카라 방송은 '뽀뽀뽀'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리 단순하지 만은 않은 것이, 혐오하는 회사였던 SM 출신의, 원카소 가운데 데뷔 초기 모습이 가장 마음에 안들었던 소녀시대가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제 마음을 열게 됩니다. 소시가 데뷔할 즈음부터 제가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숨통이 좀 트여서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이돌이라는 것이 결국 어린 여자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도전하는 길이고, 방송에 어떻게 비춰지던 그들 개개인은 그대로 순수하고 풋풋하며 청춘의 치기어린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 거죠. 예전에 욕을 하며 봤던 아이돌 방송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자 지칠대로 지쳐있던 제게 아이돌이라는 존재가 삶의 활력을 가져다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어린 소녀들이 무언가에 도전하고 부딪치는 순수한 모습들을 보는 것이 하루하루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았습니다.
종일 웃기는 것을 보지 않으면 무너져버릴 것같은 마음에 예능에 빠져들었지만, 예능은 그저 썩어가는 피를 고이지 않고 돌게끔, 겨우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준 존재였다면, 아이돌은 새로운 피를 만들어 저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텔미가 빵 터졌습니다. 원더걸스가 시구를 한다는 이유로 잠실 야구 경기가 매진이 되었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죠. 이때는 완전히 아이돌에 빠져서 DC의 갤러리들과 카페, 사설 자료방,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예전에 종일 예능을 보던 식으로 훑고 또 훑었습니다. 원걸 소시가 공중파에 얼굴을 자주 들이밀게 되었기 때문에 케이블 외에도 볼 거리가 많았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때는 오히려 카라가 이런 면이 다른 아이돌에 비해 더 부족했습니다. 당시 아이돌을 순수하게 좋아하게 만들었던, 옆집 동생을 보는 듯한 친근하고 풋풋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 카라에게서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 때문에 카라를 좋아한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당시에 원걸 소시가 카라 이상으로 성공했던 건 그들이 카라 이상으로 그런 면을 잘 보여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의 태연양이 얼마나 독하고 성실한 노력파였는지, 그 당시의 선예양이 얼마나 착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보여줬는지 잘 모르실 거예요. 왜 그렇게 원걸과 소시에 삼촌팬들이 몰려들었는지를요. 당시의 카라는 정통파 보컬 그룹의 인상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감동은 그다지 많이 주지 못하고 있었죠. 오히려 그 당시에 감동을 준 건 카라보다도 카밀리아였어요. 네이버에 소시나 원걸을 검색하면 '소시 원걸 가운데 누가 더 실력이 좋나요?' 같은 지식인 글이 수도 없이 올라오던 땝니다. 그런 글을 클릭하면 언제나 카밀리아의 정성어린 답변들이 있었어요. 이런 점에서 소시도 좋고, 저런 점에서 원걸도 잘하지만, 카라도 있다. 실력을 논하자면 카라가 진짜 실력파다. 또, 소시 원걸로 점철된 남초 사이트에서 관심도 못 받으면서 꾸준히 카라 관련 글을 올리던 분들도 있었습니다. 방송에서 완전히 잊혀진 동안에도, 사실은 케이블에서 활동한 승연이보다 이런 카밀리아들이 카라를 잊지 않게 해 준, 알게 해준 진짜 공로자들이었다고 생각해요.
말이 나온 김에 데뷔 당시 승연이에 대한 인상을 좀 써보자면, 이영자가 했던 말 그대로 맥아리가 없었습니다. 뭘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솔직해 보이지도 않고, 실력도 없어 보이고... 다른 멤버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게, 성희는 의욕이 별로 안 보였고, 규리는 늘 뭔가 겁내는 것 같았고, 니콜은 아무 생각이 없... 그러던 게 제 기억엔 쇼바이벌에서 대차게 데이면서 달라졌던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눈에 띄게 달라진 게 승연이었죠.
그러다가 카라가 해체한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순진무구한 니콜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었죠. 승연이야 혼자서도 방송 활동 잘 할 것 같았지만, 다른 멤버들은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뭐, 성희는 그냥 탈퇴해 버렸구요. 저도 락유 나오기 얼마 전부터 소녀시대 팬 몇 명한테 크게 데여서 소시 커뮤니티는 눈팅도 접어가고 있었고, 원걸은 이미 미국행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구요. 이런 저런 이유로 아이돌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질 무렵에 락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아아...너무 실망이었어요. 자주 다니던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드디어 아이돌 외모 종결자가 나왔다!" 이러면서 하라 사진을 쭈욱 올려놨는데, 거기에다 '장난하냐?'라는 식으로 댓글을 달 정도였죠. 니콜을 계속 볼 수 있게 돼서 기쁘긴 했지만, 하라랑 지영이는 카라의 발목만 잡을 것 같았어요. 지영이는 아예 관심밖이었으니 그렇다치고 특히 하라. 데뷔 초의 승연이보다 더 맥아리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곧장 연예인 노릇부터 할 것같은 인상... 하라 지영이가 막 데뷔했을 때 몇 번 찾아보고 카라는 접어버렸습니다. 승연이 나오는 방송만 찾아서 보고 그랬었죠.
그리고 그 해 초가을 어쩌다가 친한 친구랑 단 둘이 추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할 게 없으니 밤새 방에서 술을 먹게 되었는데, 그냥 먹기 심심해서 아프리카 방송을 틀었습니다. 아이돌 무대 영상만 보여주는 방송이었어요. 저는 그래도 아직 아이돌에 빠져있을 때니까 그러면서 발을 빼려던 참이었으니까 친구에게 솔직하게 내가 얼마전까지 아이돌을 참 좋아했다며 그 방송을 틀어뒀습니다. 근데 이 방송을 트는 사람이 대체 누구였는지...밤새도록 무대 영상을 트는데 80%가 카라 영상이고, 그 중 대부분이 락유 무대 영상이었습니다. 처음에 DSP직원인 줄 알았어요. 아니면 미친놈인줄...(죄송..)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 다른 데 돌리는 것도 귀찮고 그냥 밤새 락유만 봤습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로 둘이 밤새 술 마시며 같은 방송을 봤구요. 어떤 사람인지 이틀째도 똑같은 방송을... 그렇게 추석을 보낸 뒤에는 이미 락유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그때부터 다시 처음 아이돌 영상을 찾아보던 때처럼 하라 지영이가 데뷔한 이후의 카라 영상을 미친듯이 탐닉했습니다. 아아 니코리..성희가 떠난 자리를 네가 메꾸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안타깝구나. 하지만, 이렇게나 크고 아름다운 점프를 뛰고 있었다니... 규리야...미안하다. 내가 너를 우습게 봤구나. 너야말로 진정 리더다. 승연아...너...이런 열정을 대체 어디에 감춰두고 있었던 거니? 뭐 아직 하라나 지영이에게까지 애정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원년 멤버들에 대한 애정은 이전보다 깊어졌습니다. 이제 원걸은 개솜에서나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고, (해외 반응 번역은 팬사이트에서도 개솜에서 퍼오고 그랬으니...) 소시는 무대영상만 보게 된 상황이라, 셋으로 나눠 애정을 보내던 때보다 카라에 집중되는 정도는 훨씬 컸죠. 2007년만큼 아이돌에 시간을 쏟아붓지는 않았어도 카라에게만은 예전보다 많은 관심을 주었습니다. 카라티가 생긴 이후로는 거의 그곳에만 상주하기도 했구요. 그리고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다섯 멤버 모두에게 같은 애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카라가 일본에 진출할 즈음에는 이미 온리 카라가 되어있었죠.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줄곧 마음에 벽을 치고 있었어요. 다른 아이돌이 성장하고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카라 너네도 변하겠지. 안 그러고 버틸 수 있겠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팬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다른 모든 아이돌들에게도 마찬가지였구요. 좋아서 소비하기는 해도 어떤 아이돌의 팬도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의 믿음이 없었던 거예요. 근데 카라 얘네들이 안 변하는 겁니다. 안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갈수록 껍질을 벗고,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는 겁니다. 데뷔 때보다 더 열정적이고, 더 순수하고, 더 밝고 건강해 지는 것이 어리둥절할 정도였죠. 왜? 너희는 왜 변하지 않는 거냐? 그만큼 성공했는데도 어떻게 전보다 더 두려워 않고 덤빌 수가 있는 거냐?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런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도 할 수 있을까? 나도 너희들처럼 여전히 도전을 할 수 있는 걸까?' 아이돌을 통해 살아가는 삶을 되찾았다면, 카라를 통해서는 그 이상의,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갈 의미를 얻게 된 거죠.
결정적으로 벽을 무너뜨려버린 것은 카라 사태로 불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저에게 그 사건은 슬픔이 아닌 감동이었습니다. 성공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바라는 행위가 아니라, 성공을 도외시하고 잘못된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로 보였습니다. 너희는 이렇게까지도 할 수 있구나! 그 순간 카라는 하나의 벽 정도가 아니라 저라는 존재를 완전히 넘어섰고, 저는 이들의 팬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누군가의 팬임을 받아들인 것은 카라가 유일합니다. 이게 저의 카라팬 입문기입니다. 알게 된 것은 꽤나 빠른 편이고, 소비하게 된 것도 빠른 편이지만, 팬이 되기까지는 정말로 오래 걸렸네요.
저는 여전히 원더걸스, 소녀시대를 비롯한 여자 아이돌들을 좋아합니다. 이제는 카라외의 다른 아이돌의 영상을 찾아보는 일은 전혀 없지만, 여전히 그들을 좋아합니다. 그들 덕분에 매우 행복했고, 즐거웠고,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대형 기획사와 아이돌 자체를 싫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과 카라 사이에는 어떤 순위 관계도 없어요. 카라는 제 마음속에서 특별히 독립된 공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비교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제가 카라의 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데뷔 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팬이 되었지만, 벌써 그때로부터도 몇 년이 지났네요. 카라는 여전히 변하기는 커녕 앞만 보고 달리는 중이고, 카라에 대한 믿음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정말로 서서히 차근차근 굳어진 믿음인 만큼 변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게 카라인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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